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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번역] Wonderful gift 10(긍정과 부정의 세계)

wonderfulgift 2025. 3. 3. 03:47

동심은 긍정

이해력은 부정

 

보통은 그렇게들 이해한다.

 

내 경험으로는

동심에도 부정은 존재하고

이해력에도 긍정은 존재한다.

 

특별하게도 동심과 이해력에는 부정과 긍정도 아닌

창의적인 무언가도 존재한다.

 

자치기와 골프를 보면

비유를 부정, 추억을 긍정, 기억을 중립

평소에 스스로 중점을 지키는 것은 정답이나, 항상 명답은 아니다.

상시로 융통성이 필요하다.

 

거칠었던 산업혁명 시대가 그 해답을 슬프게도 휘저어놓았다.

 

중점을 맞추려면

동심도 긍정, 이해력도 긍정, 기억도 긍정이 될 필요가 있다.

압도적인 보호 아래 시대에 중점이 어그러진 자의 중점을 사회가 맞춰주지 못하면

어찌 부끄럽지 않은 미래 시대와 어울리는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어찌하여 미래세대인 청년들은 편협한 이득을 우선하여 이러한 역사를 외면하고

처절하게도 살아가고자 하는 어르신들을 내버려둘 수가 있는 걸까

부끄럽지 않겠나. 평생.

 

실리적으로 각 개인 또는 단체에 이득이 되지 않으니까

그런 상황에 맞춘 적합한 대응에 따라 사라져가는 개인의 권리와 영향은

과연 안전과 안정을 이룰 수 있을까.

그것은 부끄러움을 뛰어넘은 위기와 위협을 초래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어왔다면 언제까지 자해할 텐가.

 

자해하는 아이에게 칼을 쥐여준 누군가는

왜 위협을 평생 받을 위기를 감당해야 하는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며 왜 타인의 호의를

보이지 않는 칼로 본인과 타인을 난도질하려 하는가.

그것은 어떤 이유든 간에 재차 부끄럽지 않겠나.

제압당한 이후에는 후회하지 않겠나.

 

그 순간의 후회가

누군가의 판단에

긍정적인 조치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부정적인 판단 및 집행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결정권자에게는 피동적으로 가해지는

가혹행위임을 모르는가.

 

모든 것을 알든 모르든,

우연인 듯 운명인 듯 방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방관하라는 상황, 그것조차 때론 예의가 아니지 않나.

 

그것은 무게인가, 의지인가, 선택인가.

 

그 상황과 배치에 따른 전략이 일반적이라면

왜 추가적인 긍정은 제시되지 않나.

 

침묵으로 긍정을 논할 수도 있고,

돌격으로 긍정을 전달할 수도 있고,

외면으로 긍정을 느낄 수도 있지 않나.

 

그것이 유대가 아닌가. 뭐든 간에.

 

누군가가 침묵, 돌격, 외면에 목숨을 건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 아닌가.

 

 

진정한, 가슴 뜨거운 사랑은 실천에서 나오니까.

실수를 해도 긍정, 실수를 하지 않아도 긍정.

그런 시스템은 없는 걸까.

없으면 만들면 되지 않을까.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어렵게만 보이진 않는데.

기회가 되지 않는 것이 어렵게 보일 때가 있을 것 같은데..

 

망설임일까,,?

 

그것은 우리에게 예의일까 신중함일까 기회일까..?

 

나는 기회라는 녀석이 우연에 기반을 둔 현상이라 생각하니,

확신에 찬 생각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으려 한다.

동시에 그것이 두렵다..

 

확신에 찬 생각이 들게끔 누군가가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면,

나는 그 누군가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그냥 망설이지만은 않으려 한다. 평소에도.

 

 

망설임의 기준이 결정의 정확도와 속도고

그것이 누군가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가설 하나

때문에 멈춰서서 지켜봐 왔다.

처절하게 버티어왔고, 죽기 살기로 사랑했다. 그리고 사랑한다.

 

그래서 조금은 망설이려 한다. 그런 판단의 일말은 망설이지는 않으려 한다.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아프고,

안전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사회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작가명으로서 Wonderfulgift를 사용하고 있는 만큼

목숨을 걸고 과감하게 돌진하려 한다.

 

행복은 망설이기만 한다면 절대로 타인에게 쥐여줄 수도 없고, 품을 수도 없다.

세상의 행복 밀도를 올리려 한다.

 

그런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글과 그림을 그려보려 한다.

사실은 그려왔다. 22년 넘게..

 

그리고 초안은 대단히 아름답고 견고한 동화가 되었다.

 

서로의 유대와 사랑을 보전해 온 우리가

이렇게나 방식이 다른데 어우러져 살아왔다면

증명은 충분하고도 충분하다.

 

 

 

진실만을 말하면, 개인적인 혜택을 받게 되니 싫고(좋고).

거짓을 섞어 말하면 적당한 수혜, 손해, 칭찬, 비난을 받으니 그런 적절한 침묵이 싫고(좋고),

그저 거짓을 말하면 비난받고 공격받기 좋으니 위로가 필요한 세상에 어울러져 살아가는 방식과 침묵이 싫고(좋고),

 

창의력을 발휘하며 개인적 침묵과 중점의 위치를 바꿔댄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의견 피력이 그저 개인의 이득을 산정한 수혜가 아닌 이해할 수 있는 개인적 수혜와 다수의 수혜로 이어지는 공식적인 즐거운 침묵과 화합으로 이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보다 중요한 업무가 있다면 왜일까? 우린 그것을 실천하고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일구어온 우리의 판단 능력을 어그러뜨리고

지성을 다루는 영역에 대하여 우선순위를 놓치고 관심을 가지는 수혜를 포기하고

타인과 함께 어우러지기 위해 노력하며 지성적 판단이 완벽하다며 설득하고

그 설득에 실패하는 것을 예상하고, 고통받고, 위협받고,

그 결과 그것을 알아보는 자에게만 감사하는 극소수의 수혜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싫어서 그 수혜를 포기하기 위해

비난을 받을 수 있는 포지션으로 들어가고

거짓을 말하며 수혜를 철폐하는 자신과

거짓을 말하며 혜택을 얻고자 하는 타인을 바라볼 때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과

방식이 다르다는 생각을 교차하며

 

수혜를 나눠주거나

방식이 다른 이를 설득하는 방법을 고안하고

그 이유가 또 다른 타인의 언행에 의한 결과가 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그런 시간 축에서 정답은 명확하지만

우리가 망설이는 이유는

 

사실은 스스로와 타인에게 진솔한 예의가 없어서다.

이 판단은 자해인가?

 

조금만 더 예의가 있었다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수혜를 주며

판과 어울릴 수 있는 방향의 제안과 제어를 언급하며

사회를 구성해 나간다면

 

거짓을 말하며 혜택을 얻는 방식을

당연하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재와 역사에 존재하는 방식은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나.

 

약탈과 위협이 당연하다면

우리가 어찌 타국과 타인을 비난하겠나.

그 방향은 어그러진 합리화를 만들 것이다.

 

나는 살면서 세계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성장하는 나라는 본 적이 있지만

괴로움을 등한시하며 진화와 발전을 거부하는 그런 나라는 본 적이 없다.

환자라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겨 여러 사람에게 광고하는 것이 아니라면,

또한 그것이 누군가가 아픈 상태라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여러 사람에게 광고하더라도

구원과 구제의 경험과 도움이 꼭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이 든다.

 

부끄러운 싸움을 해오진 않았을 때니, 수혜는 아닐 것이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향이 전환된다면

스스로의 인생에 후회는 없게 한 반 내디뎌보자.

 

죽기 살기로 걸어보자.

 

내가 30년 이상 지켜본 그대들의 힘은 그것을 웃돈다.

 

사랑합니다. 내일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하더라도.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행복 혁명’ 이제 시작입니다.

 

 

어떤 하루를 그려드릴까요?

 

어떤 세계를 그려갈까요 우리.